Passion / Palm Sunday
수난/종려주일은 교회력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목숨을 바치신 것을 기억하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수난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들의 찬양의 함성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요구로 바뀌고, 예수는 가시 면류관을 받으시고 조롱과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수난/종려주일은 교회력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목숨을 바치신 것을 기억하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수난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들의 찬양의 함성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요구로 바뀌고, 예수는 가시 면류관을 받으시고 조롱과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호산나와 할렐루야 사이
Between Memory and Hope: An excerpt from the Companion to the Book of Common Worship
(Geneva Press, 2003, p. 96)
"왜 열정과 손바닥을 결합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첫째, 역사적 전통에 부합합니다. 적어도 4세기부터 고난주간, 즉 대주간 첫날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수난이었습니다. 손바닥 행렬이 끝나면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를 읽습니다. 서양 교회는 성주간 첫날을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집중하고 수난과 손바닥을 떠올리며 성주간을 지켰습니다. ..
목회적 가치는 열정과 손바닥을 결합한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 금요일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스토리가 왜곡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죽음에서 부활까지 건너뛰는 이야기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회피합니다 종려주일의 '호산나'에서 부활절의 '할렐루야'로 넘어가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라는 중차대한 사건을 간과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은 십자가가 목표이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승리의 순간에도 십자가가 시야에 잡혀 있어야 합니다. 수난/종려주일에 수난 이야기 전체를 읽는 오랜 전통을 이어온 교회들은 수난 이야기 전체를 듣는 것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
수난과 시편을 결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 때문입니다. 부활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부활절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신비를 오랫동안 주의 깊게 묵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영광의 신학( )은 죽음을 부활로 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죽음을 중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죽기만 하면 되며, 죽으면 자동으로 무덤에서 영광으로 올라갑니다. 반면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십자가 신학( )은 부활은 단지 고난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신앙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으면 부활을 얻게 된다고 함으로써 죽음을 '일'로서 지나치게 중시할 수 있습니다. 대신 십자가와 부활은 신학적으로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정도는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호산나를 울리는 손바닥 행렬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의 할렐루야를 상징적으로 예고합니다. 이러한 전례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따라서 수난/종려주일에서 부활절까지 8일간은 한쪽은 부활과 죽음으로, 다른 한쪽은 죽음과 부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주간이 시작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확인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손바닥을 수난/종려주일로 함께 묶은 이유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