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5-26)

우리는복음에 호소함으로 그러한 제적 분리를 합법화하려 하고, 순종과 화해의 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편과 두려움과 이기과 불신 문에 미리 화목케 하는 복음의 력을 부인하는 가르은 어느 것이라도 이데올로기 및 거교리로 여야 함을 믿는다. (벨하 신앙 고백에서)

백인우월주의는 머리를 들고 주말 뉴스를 장악했습니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허황된 성명서로 인하여 극우 백인들의 존재와 광신적인 인종 비하적 수사학 및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함을 공격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인종적 증오와 편협이 우리 사회에서 고립된 사건이라는 주장을 부인하는 진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백인 우월 주의자들의 뻔뻔스러운 행동으로서 버지니아주의 유명한 대학 도시인 샬로츠빌의 거리에서 지배력, 통제력 및 우월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주장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오하이오 주 마우미의 제임스 알렉스 필드James Alex Fields Jr.가 백인우월주의의 이름으로 한 명을 죽이고 수십 명을 부상시킨 자동차 운전자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른 백인우월주의자인 로버트 리 Robert E. Lee의 동상을 지키기 위해 극우 백인alt-right들이 조직한 시위의 결과입니다.

인종차별의 모습은 21세기 미국 전역에 있습니다. 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와 기업 모두 가장 높은 자리에서의 인종 차별적인 태도와 함께 우리는 교회안에서 어디에 있습니까? 단순히 거리와 TV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미국의 새로운 날을 조직하는 현대의 선지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수사학적인 질문은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지난 주말에 당신의 회중에게 무엇을 설교 했습니까? 이 시대에 행동해야 할 긴박한 상황, 내용 및 결과를 다루는 예언적 해방의 말씀을 전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심에 관한 주일 성구집을 설교 했습니까?

성구집 본문은 미국의 백인우월주의가 우리가 설교하기 전날에 전국 텔레비전에서 그 못생긴 얼굴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백인우월주의를 경험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설교의 전환이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설교 제목을 바꾸거나, 성경 본문을 조정하고, 심지어 설교를 버리고 예배가 시작되기 전날밤이나 또는 몇 시간 전에 다시 시작하는 것조차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 속 현실의 일부입니다. 저의 아버지, 삼촌 및 다른 성직자들의 시민 운동을 통해 어린 시절 경험하였던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회자와 다른 사람들은 트레본 마틴Trevon Martin의 토요일(자정) 판결, Emmanuel AME 교회 기도모임/성경공부 총기 난사사건(주중); 경찰의 월터 스콧 총격 사건(토요일 오후)과 수없이 많은 수의 구금, 추방 및 새로운 이민자를 포함한 지역 사회에서의 경찰의 폭행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준비를 조정했습니다. 한밤중의 설교준비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갖고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준비를 시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게으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역 사회의 압도적인 상황적 현실은 매주 20시간의 설교/준비 시간을 낼 여유조차 어렵게 만듭니다. 이 경우 그들의 설교는 공동체 혼란의 압도적인 상황에 의해 형성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주말 백인우월주의가 단순히 개인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 "주의isms"에 이름을 짓지 못하는 침묵과 잘 만들어진 성명을 통해 지지를 제공하는 시스템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도 구조적 인종차별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동하고 거부하는 것을 통해 연루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Charlottesville에서 행한 바로 그 행위와 공모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개인적인 책임을 저글링juggling함에 있어서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모든 압력을 감안할 때 이것이 부당한 판단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교회 지도자(성직자, 평신도, 세례교인)로 판단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제서야 이 모든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지난 사건과 관련된 성서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교회 장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화적 맥락에서 관련이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국가의 백성으로서 충실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E. 리의 동상 보호를 위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활동과 극우 백인들의 떠오름을 상황 해석하지않고 성구집에 대한 본문의 해석으로 물 위를 걷는 예수의 기적만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공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너희가나를사랑하면나의계명을지키리라내가아버지께구하겠으니그가다른보혜사를너희에게주사영원토록너희와함께있게하리니"(요14:15-16). 보혜사는 "옆에 서거나 서서"를 의미하는 희랍어 advocare에서 옵니다. 그것의 함축된 의미는 피고인의 옆에 서있는 변호사와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실존없이 믿음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시며, 그분을 인도한 영적 현존은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들 옆에 서있을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옹호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희생당한 사람 옆에 걷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정의 옹호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종차별은 이 나라의 역사적인 병자와 유색인종의 희생자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영혼의 암으로써 사랑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신자와 불신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만을 보지 않고 우리의 눈을 들어 전능자를 바라볼 때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전문직 및 기타)을 기꺼이 감수할 때까지 백인우월주의는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누가복음 17:33)고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 교단은 미국에서 400년 이상의 백인우월주의를 근절하기 위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222번째 총회에서 벨하 신앙고백을 축하하는 것은 즐거운 행사였으며, 인종차별에 우리 미국장로교회(PCUSA)가 연루되어 있었음을 고백하며 세상을 뒤집어 놓을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벨하 신앙고백에서 발췌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복음에호소함으로그러한강제적분리를합법화하려하고, 순종과화해의길로나아가지않고오히려편견과두려움과이기심과불신때문에미리화목케하는복음의능력을부인하는가르침은어느것이라도이데올로기거짓교리로여겨야함을믿는다."

인종적 우월의 행동과 이데올로기는 학습됩니다. 딜란 루프Dylann Roof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소재한 엠마누엘 Emanuel AME 교회에서 성경공부/기도모임에서 교인들을 죽인 날 밤 자신의 조끼에 아파타이드 문양을 착용했을 때는 21세였습니다. 루프는 1994년에 태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없이 문양이 무엇을 나타냈는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증오가 그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는 증오심에 대한 교리였고 우월성은 인종에만 근거가 있다는 단편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주말에도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데도 뻔뻔스럽게도 인종차별의 기치를 계속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사랑과 서로 사랑하라는 부름에 대해 무엇을 설교하고 가르칠 것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성령과 진리로 주님의 이름을 용기 있게 선포하시렵니까?

저는 벨하Belhar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장로교회에 도전하는 약속을 계속 지키려는 공동 총회장인 Jan Edmiston과 Denise Anderson목사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현재 시대의 변혁자가 되기 위해 우리 교단에 도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책읽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넓혀주었습니다.

저는 장로교 선교국의 인종 사역부의 사려 깊은 사역들과 미국장로교 내외에서 벨하를 수행하기 위해 계속해서 힘든 일을 수행하는 총회 사무국의 에큐메니칼 증인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미국에서의 인종에 관한 새로운 시대를 목격해야 합니다. 우리의 위험은 백인우월주의와 관련이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복음을 통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 못함에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의 선포자와 청중은 우리 나라의 영혼을 해치는 이 불편한 문제에 관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가 존립할 수 있는 증인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깊은 신앙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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