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면서도 강력한 만델라의 리더십이 정의를 위한 교회의 분투에 격려가 되다
에바 스팀슨 (Eva Stimson), 장로교 총회 사무국(OGA)
어제 세계 각국의 고관들이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을 위해 남아프리카에 모여드는 가운데, 몇몇 장로교 리더들은 인종 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거목이 된 이 겸손한 사람의 생애와 유산을 묵상해 보았다. 그들은 또한 인종파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장로교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투자를 통한 선교 책임부서MRTI)의 장로교 책임자인 빌 솜플라스키-자맨(Bill Somplatsky-Jarman)은 이 부서가 만델라와 다른 남 아프리카 사람들의 용기에 얼마나 고무되었는지, 그래서 은행들로 하여금 남 아프리카에 돈을 빌려주는 것을 멈추도록 압박하는 국제 에큐메니칼 노력에 어떻게 협력하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우리는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과 협력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본인들에게도 협력을 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이 남 아프리카 정부에 경제적 압력을 가했으며, “결국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솜플라스키-자맨은 말한다. 그는 이러한 노력이 “아마도 MRTI가 행한 가장 훌륭한 일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한다.
1984년의 장로교 총회는 본질적인 성경의 원리들에 충돌하는 정책들을 지지하는 회사들에 투자를 중지하라는 전략을 채택했는데, 솜플라스키-자맨은 그러한 결정이 있은 직후에 MRTI에 합류했다. 그 총회는 남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회사들에 이 전략을 적용하라고 지시했었다.
그 총회는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에 거론되었던 염려들에 의거하여 그러한 결정을 했던 것이다. 솜플라스키는 투자 중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63년에 남 아프리카를 방문했던 장로교 여성 단체들이라고 말한다.
그 여성들은 얼마나 많은 미국의 회사들이 거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지를 목격했다. 그들은 그 여행에 대한 보고서에서 인종차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회가 이러한 회사들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만약 그 일이 실패한다면, 교회는 아마도 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그러한 회사들의 모든 주식을 판매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177차(1965) 미국 연합 장로교 총회(UPCUSA)의 한 성명서에 의하면,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경 말씀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것이며, 기독교의 윤리적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되어있다 (Minutes, UPCUSA, 1965, Part I, p. 403).
그 총회는 인종차별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옹호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 칭하면서 “남 아프리카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혹은 종이나 자유자가 없음-- 새로운 인류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인종차별의 죄악을 회개하는 일에 동참해달라고 간청했다.”(ibid, p. 405).
20년 후인 197차(1985) 미국 장로교 총회는 남 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회사들의 유가증권을 “선택적이고 단계적으로 매각을 하자는” (Minutes, 1985, Part I, p. 230)제안—MRTI가 고안함—을 승인했다. 그 당시 수많은 교회들, 대학들, 도시와 주 정부들, 그리고 다른 그룹들이 남 아프리카 소수 백인들의 세력을 부추기는 활동을 하는 회사들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는데, 미국 장로교는 이러한 결정을 통해 그들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솜플라스키-자맨은 “이 일을 위해 모든 수준에서 엄청난 양의 수고가 있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결국 인종차별 정책을 무너뜨린 것은 “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했기 때문이다”고 믿고 있다. 그는 “남 아프리카 사람들이 강인함을 유지하지 못했다면 이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와 다른 장로교인들은 넬슨 만델라가 그 투쟁의 주요 리더였다고 인정한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연합 장로교 프로그램 부서(Program Agency)의 책임자였던 오스카 맥클라우드 (Oscar McCloud)목사는 1990년에 만델라가 석방된 직후에 남 아프리카의 소웨토 (Soweto)에서 그를 만났다. 지금 77세이며 아틀랜타에서 은퇴를 한 맥클라우드 목사는 세계 교회 협의회에 의해 남 아프리카에 파견된 대표단의 한 사람이었다.
맥클라우 목사는 만델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분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에 여전히 적응하고 있는 듯이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나에게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그분 안에 쓴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을 보았다면, 아마도 그가 27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맥클라우 목사는 만델라가 교회에서는 활동적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기독교의 참다운 모습을 실증해 보였다고 믿고 있다. “만델라는 증오심을 품고 사는 것은 자신의 압제자들에게 승리를 양도하는 것이며, 압제자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맥클라우는 남 아프리카의 백인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지도자들과 가졌던 성과없는 몇몇 모임들을 회고했다. 그들의 신학은 인종차별 정권을 옹호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한 만남으로 인해 그는 인종차별이 없는 정의를 위해 평화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소망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나는 인종차별이 시행되고 있는 때에 남 아프리카를 몇 번 방문하면서 남 아프리카가 거리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는 그 나라의 시스템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델라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 연합 장로교 188차(1976) 총회장이었으며, 교회 여성 연합 모임(Church Women United)의 이전 의장이었던 텔마 아데어(Thelma Adair)가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있었던 ’1990 예배’에서 넬슨 만델라를 만났다. 그것은 만델라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한 종교 커뮤니티의 모임이었다. 맥클라우드 또한 거기에 참여했다.
현재 93세인 아데어는 강대상 위에서 넬슨과 위니 만델라와 함께 앉아 있었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그 모임에서 성경을 읽기로 되어 있었다. 아데어는 “세 시간이 넘는 예배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말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발목이 매우 부어있었던 것을 목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만델라에게 그것에 대해 걱정이 된다고 말했을 때 그의 겸허한 반응으로 인해 깜짝 놀랐다. 그는 그러한 신체적 불편함—끊임없는 이동과, 연설을 위해 서있어야 하고, 잘 쉬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그가 보여줄 수 있는 헌신적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아데어는 그가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에 의해 놀랐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인종차별의 수치감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도래하는 세대들을 위한 고귀한 유산이다.”
아데어는 인종차별 정권과 만델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만델라의 모범이 오늘날 인종차별 그리고 다른 불의들과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데어는 만델라가 교회에 주는 불후의 메세지가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담대하라. 거인에게 도전하라. 당신이 믿는 것들을 증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