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sustainable) 사역은 지속 가능한 사람들로부터 초래된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많은 상황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땅이 내어줄 수 있는 것과 땅이 옥토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농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또한 견고한 경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원들을 갖추고 있는 공동체들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재생 가능한 에어지 자원들 또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우리는 또한 교회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개체 교회는 그 교회가 하는 사역 그리고 정직히 말해서 그 교회의 사역자들을 후원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들을 지니고 있을 때 지속 가능한 교회로 여겨진다. 나는 여기에서 약간 다른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개체 교회는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제자화 양육을 해 나갈 때 지속 가능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상이한 이미지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재봉틀의 혜택을 받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고 있는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라는 말씀을 듣는다. 반면에, 우리는 또한 모래가 아니라 반석 위에 우리 집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혹은 주의를 다하여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약간의 혼동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지속 가능한 사역은 지속 가능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 때문에 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영혼은 좋은 설교 및 가르침, 참된 교제, 그리고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에 대한 정직한 반추를 통해 양육 받으며, 사람들을 돌보라는 복음서의 도전을 받아 들이고,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그 단어를 이렇게 정의하면, 자신들의 지역 사회 안에서 열의를 가지고 섬기는 20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는 지속 가능한 교회이다. 이들은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들로 그들의 카이로스 시간을 채우고 있다. 그들은 백합의 예를 따르면서, 또한 반석 위에 집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죤 아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세상에서 행해진 가장 위대한 활동들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다면…우리는 그러한 활동들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 당시의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Old Family Letters, p. 9). 당신도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 지속 가능한 제자화 및 지속 가능한 사역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